서경석 목사 "장경동 불교비하 발언에 관용할 필요 있다"
2MB의 싸움 붙이기 신공은 이제 정치의 영역을 벗어나 종교의 영역까지 확대되는 모양이다. 최근 현 정부의 종교 편향에서 비롯된 불교계의 불만과 그에 대한 개신교의 망발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특히 TV 출연 등으로 낯익은 장경동 목사의 불교 비하 발언은 불교계의 불만에 기름을 들이부어 버린 꼴이다.
장경동 목사. 이 양반 나름대로 신앙을 전파하려고 스스로를 낮추고 재미있는 목사라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호감이 가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자신을 낮추는 모습은 철학 없음과 다름없다는 것이 이번 일로 드러났다고 봐야 하겠다. 그저 생각 없는 가벼운 인물이었을 뿐이다. 자신과 믿음이 다른 사람에 대한 관용과 이해가 없는 중세적 사고관의 인물이다.
하지만, 그런 장경동 목사 같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서영석 기독교 사회책임목사는 장경동 목사를 비롯한 그런 이들에게도 관용을 보이자고 한다. 그러면서 불교는 여태껏 관용의 종교였으니 이번에도 관용을 보이라고 한다.
그렇다. 불교는 관용의 종교였다. 불교도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수천 년을 이 땅에서 화해와 자비를 가르쳐 왔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떠한가? 관용의 종교가 될 수는 없는가? 이해의 종교가 될 수는 없는가? 스스로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못하지만 다른 종교는 자신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여기서 형평성을 이야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저런 장경동 목사 같은 사람들의 속내다.
그들같이 다른 이에 대한 관용과 이해가 없이 다른 이들을 무시하는 자들의 속내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다. 다른 이들이 그들의 잘못에 대해 관용을 베풀면 그들은 스스로 잘나서인 줄 착각을 하고 고칠 줄을 모른다. 오히려 상대를 무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불교인들의 항의는 정당하다. 다시는 스스로 잘나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그저 참아줬고 이해해 줬기 때문에 자신이 지금의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지시켜야 할 것이다.
2MB의 싸움 붙이기 신공은 이제 정치의 영역을 벗어나 종교의 영역까지 확대되는 모양이다. 최근 현 정부의 종교 편향에서 비롯된 불교계의 불만과 그에 대한 개신교의 망발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특히 TV 출연 등으로 낯익은 장경동 목사의 불교 비하 발언은 불교계의 불만에 기름을 들이부어 버린 꼴이다.
장경동 목사. 이 양반 나름대로 신앙을 전파하려고 스스로를 낮추고 재미있는 목사라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호감이 가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자신을 낮추는 모습은 철학 없음과 다름없다는 것이 이번 일로 드러났다고 봐야 하겠다. 그저 생각 없는 가벼운 인물이었을 뿐이다. 자신과 믿음이 다른 사람에 대한 관용과 이해가 없는 중세적 사고관의 인물이다.
하지만, 그런 장경동 목사 같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서영석 기독교 사회책임목사는 장경동 목사를 비롯한 그런 이들에게도 관용을 보이자고 한다. 그러면서 불교는 여태껏 관용의 종교였으니 이번에도 관용을 보이라고 한다.
그렇다. 불교는 관용의 종교였다. 불교도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수천 년을 이 땅에서 화해와 자비를 가르쳐 왔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떠한가? 관용의 종교가 될 수는 없는가? 이해의 종교가 될 수는 없는가? 스스로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못하지만 다른 종교는 자신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여기서 형평성을 이야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저런 장경동 목사 같은 사람들의 속내다.
그들같이 다른 이에 대한 관용과 이해가 없이 다른 이들을 무시하는 자들의 속내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다. 다른 이들이 그들의 잘못에 대해 관용을 베풀면 그들은 스스로 잘나서인 줄 착각을 하고 고칠 줄을 모른다. 오히려 상대를 무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불교인들의 항의는 정당하다. 다시는 스스로 잘나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그저 참아줬고 이해해 줬기 때문에 자신이 지금의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지시켜야 할 것이다.

